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기 과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장영실이라는 인물이 있다. 당시 노비 신분이었던 그는 뛰어난 손재주를 인정받아 궁 내 기술직 공무원으로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이후 천문 관측 기구 제작 및 혼천의 개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종3품 대호 군에까지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1442년 가마 파손 사건 관련 책임 문제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그는 사라진 것일까? 여기서 잠깐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 과거로 돌아가 보자. 15세기 초 한양 도성 한복판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임금이 탄 가마가 부서진 것이다.
누구를 범인으로 지목하였나?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장영실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물론 누명이었지만 왕명을 어긴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쫓겨났다. 그리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만약 이때 억울함을 호소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목숨만은 부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침묵했고 끝내 모든 걸 포기했다. 아마도 주변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단면인지도 모르겠다.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하지만 정작 불의나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그저 조용히 입을 닫고 모른 체 외면할 뿐이다. 심지어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제부터라도 달라져야 한다. 잘못된 일엔 당당히 목소리를 내야 하고 부당함에 대해선 끝까지 맞서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억울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자격루를 비롯해 해시계 앙부일구, 측우기 등 다양한 발명품을 탄생시킨 천재 과학자 장영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아마 상상조차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IT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인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일에는 명암이 존재하듯 빛과 그림자 역시 공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일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한글 창제라든지 농업 생산 증대 등 보다 획기적인 성과를 이뤄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하루빨리 진실이 밝혀져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한 그의 넋을 위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상한 점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실록 편찬 과정에서 누락된 내용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장영실이 명나라 사신 접대 자리에서 술에 취해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되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정황상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재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그가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걸 잃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자로 칭송받고 있는데 정작 후손들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으니 씁쓸할 따름이다. 하루빨리 진실이 밝혀져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